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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at 13-02-12 19:42
Aquarium / 진동선
 written by 관리자
 
현대적 삶의 조건 혹은 기만된 삶의 이면
 
 
1994년 여름으로 기억한다. 우연히 찾아간 휴스턴 아쿠아리움(Aquarium)에서 또 하나의 바다를 만났게 되었는데 그때 그곳에서 무엇 때문에 80년대 서구 미술이 이율배반적인 삶의 조건, 삶의 아이러니를 통해서 진실의 의미를 말하려 했을 때 ‘바다’를 맨 먼저 소재의 중심에 놓았는지를 알게 되었다. 태초에 신이 자연의 이름으로 창조한 것은 바다였다. 그런 바다가 이제 인간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아쿠아리움이다. 인간이 창조한 거대한 인조 바다, 흔히 수족관이라고 부르는 모조 바다가 아쿠아리움이다. 아쿠아리움은 후기 산업사회의 오락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자본주의 시대 풍경 가운데 가장 역설적인 풍경이자, 인공성의 원류이며, 유희와 여흥을 위해 만들어진 기만된 자본주의 판타지이다.
 
따라서 휴스턴 아쿠아리움에서 보았던 것은 헤엄치는 금붕어의 모습이 아니라 샌디 스코글런드(Sandy Skoglund)의 <금붕어의 복수Revenge of the Goldfish)>(1981)였으며, 또한 부유하는 돌고래의 모습이 아니라 뤽 베송(Luc Besson)의 <그랑 블루(Le Grand Bleu)>(1988)였으며, 또한 너울거리는 군락의 말미잘 떼가 아니라 보이드 웹(Boyd Webb)의 <아실럼Asylum>(1988)이었다. 수중통로를 거닐 때마다 거대한 수족관에서 왜, 무엇 때문에 그 시대 작가, 감독들은 뉴 웨이브를, 누벨 바그를, 누벨 이마주를 생각했는지 알게 되었다. 아쿠아리움처럼 화려한 세트, 화려한 색감, 판타스틱한 이미지들은 우리 시대 생경한 풍경에 대한 그들의 반어적 상징계였다.
 
샌디 스코글런드의 화려한 <금붕어의 복수>는 유희적 삶의 인공성과 그로 인해 파괴되어 가는 자연성을 경고하기 위한 것이었고, 뤽 베송 감독이 영화 <그랑 블루>는 인간이 한계를 넘어섰을 때 찾아오는 죽음과, 결코 자연(바다)처럼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이었으며, 보이드 웹의 현란한 <아실럼> 또한 대처 정권의 최대 과오인 환경 파괴, 즉 산업폐기물에 의한 엄청난 수질 오염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한 아쿠아리움이 이제 또 다른 자본주의적 삶을 경고하기 위해 태어난다. 이정록의 “아쿠아리움”은 현대사회의 불안한 이면을 되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수족관을 통해서 그는 후기 산업사회가 파생시킨 자본의 의미와, 우리의 삶이 “누군가로부터 혹은 무언가로부터 희생물이 되고 있다”는 기만적인 삶의 조건을 이야기한다. 그는 아주 오래 전부터 물고기를 탐색해왔고, 물고기들을 예술의 메타포로서 활용해왔던 작가이다. 그런 그가 수족관을 현대인의 삶의 이면으로 확대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에게 수족관은 하루 하루를 카드에 의존하고, 카드 빛을 돌려 막기 위해 허덕이며 사는 시대 풍경으로 자리한다. 오늘날 신용불량자들의 숫자가 수백만 명에 이르고 있음을 볼 때 그가 그들의 상황을 수족관의 물고기들로 의인화하는 것은 시대성의 결과물로 보인다. 물론 논리의 비약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정황이 수족관 어류의 삶의 정황과 비슷한 현실성과, 실제로 현대인의 삶의 조건이 수족관 어류들의 삶의 조건과 동일한 면이 상당하기에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다.
 
이정록이 바라본 수족관은 삶을 반영하는, 현대적 삶의 투사하는 너, 나, 우리의 수족관이다. 장소, 크기, 화려함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화려한 아쿠아리움에서 헤엄치는 어류들이나, 횟집 수족관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물고기들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바둥바둥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나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명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카드를 덥석 물어버린 거대한 자본의 희생물, 그리하여 목에 날카로운 죽음의 낚시 바늘 하나 박힌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의 조건”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사진은 현실을 관통한다. 물고기의 눈과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으로 관통하고, 희망을 상실한 현대인의 삶의 정황과 죽음의 낚시바늘을 찾는 물고기의 삶의 정황으로 관통한다.
 
이제 아쿠아리움은 80년대 문명적, 환경적 메시지를 넘어 현대 자본주의 꽃, 신용카드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확장성에 대해서는 다소간의 의구심이 생긴다. 과연 현대인들의 삶의 정황이 물고기들의 삶과 어느 정도 일치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들의 자율성과 타율성이 구별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대인들이 신용카드가 물고기들의 낚싯밥과 동등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의 문제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어쩔 수 없이 목매달아야 하는 삶의 조건이 있고, 역설적으로 현대인들은 그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대적 삶이란 것이 궁극적으로 소비사회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작가가 말한 “우리 모두가 낚시 바늘 한 두개쯤 목에 박고서 탁하고 좁은 수족관에 갇혀서 무언가의 희생물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전적으로 부정할 수만도 없는 것이다.
 
이정록이 투사한 자본주의 사회는 “수족관-낚시바늘-물고기들의 삶의 조건”= “자본주의 체제-신용카드-현대인들의 삶의 조건”으로 나타난다. 이 같은 상징체계는 재현의 방법에서 더욱 확실히 나타난다. 평면으로 제시되는 물고기(눈) 사진에서 그렇고, 입체로 제시되는 수족관 설치물에서도 등가의 의지가 나타난다. 물고기와 인간을 동등 조건으로 바라보겠다는 분명한 자세 표명은 작품의 디테일로 들어갈수록 더욱 분명히 나타나는데, 예컨대 물고기의 눈을 찍은 사진은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눈을 표상하며, 설치 작품에서 낚시바늘에 걸린 것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필요한 현대인의 필수품 크레디트 카드이다. 그는 현대인에게 삶의 조건이란 물고기와 조금도 다를 바 없으며, 물고기가 살기 위해 죽음의 낚시바늘을 꿰어차듯 현대인들도 생존을 위해 크레디트 카드를 낚아채려 한다고 말한다.
 
이정록의 작품은 이 같은 상징성이 강점이다. 표현이 직접적이지 않다는데 매력이 있고, 줄곧 간접적으로, 은유적으로, 오로지 이미지를 통해서만 깨닫게 한다는데 매력이 있다. 작품의 의미 작용 또한 여기에 있다. 삶의 아이러니를 말하기 위해 수족관을 끌어오고, 물고기 인생을 통해서 현대인의 인생을 말하는 그 의미 작용이야말로 그의 작품의 독특함이다. 이 독특한 상징어법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의 삶의 조건이 얼마나 기만된 삶의 조건인가를 반추하게 된다.
 
 
진동선 (사진평론가) /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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